구상회화의 부활, 베네치아를 물들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운하는 올해도 세계 미술계의 중심 무대로 변모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 축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리는 가운데, 도시 곳곳에서는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특별전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대운하를 따라 자리한 유서 깊은 바로크 궁전 카페사로(Ca' Pesaro)는 올해 가장 주목받는 전시장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영국의 대표 여성 화가 제니 새빌(Jenny Saville)과 미국 회화 작가 헤르난 바스(Hernan Bas)의 대규모 개인전이 개최되며 구상회화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제니 새빌은 1990년대 영국 현대미술을 이끈 YBA(Young British Artists) 세대의 핵심 인물이다. 데이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과 함께 동시대 미술의 방향을 바꾼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비만 여성, 성전환자, 상처 입은 신체 등을 대형 화면에 담아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불완전성을 동시에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표작을 포함한 30여 점이 공개된다. 두터운 유화 물감과 강렬한 붓질로 표현된 인체는 관람객들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새빌은 2018년 작품 'Propped'가 경매에서 당시 생존 여성 작가 최고가를 기록하며 세계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함께 전시를 선보이는 헤르난 바스는 몽환적인 미소년 이미지를 통해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 30여 점이 공개되며, 특히 베네치아 레지던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The Visitors’ 연작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유머와 퇴폐미, 환상성과 고독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바스 특유의 서정성과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녹아 있는 작품들은 젊은 컬렉터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한편 인근 16세기 궁전 팔라초 만프린(Palazzo Manfrin)에서는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애니시 커푸어(Anish Kapoor)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는 빛의 99% 이상을 흡수하는 초고밀도 흑색 물질 ‘반타블랙(Vantablack)’을 활용한 작품과 거대한 스테인리스 설치물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공간과 빛,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특히 반타블랙 설치 작품은 마치 끝없는 심연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야 속 형태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호흡과 발걸음만이 남는 경험은 애니시 커푸어가 추구해 온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베네치아는 다시 한번 회화와 설치미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예술 도시로서의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제니 새빌의 육체, 헤르난 바스의 환상, 애니시 커푸어의 무한한 공간은 서로 다른 언어로 동시대 인간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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